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3월 활동입니다!

박헌수 2025-03-15 조회수 19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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안녕하세요. 파안장학문화재단 2024-2 N차 장학생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박헌수입니다. 오늘은 내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제가 경험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.


저는 불행 중 다행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복지 선진국에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. 6세 때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, 기초생활수급자와 한부모가정, 다문화가정으로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. 이 고난을 혼자서 감당했다면 저는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. 그러나 이 고난 속에서 저를 사랑해주시고, 가족처럼 돌봐주시는 분이 계셨기에 무사히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.


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초중고 12년 동안 결식아동으로서 지원을 받았습니다. 초등학교 1학년 때 먹을 것이 없어 3일을 꼬박 굶어 배가 고파 구역질이 날 듯한 고통을 겪었습니다. 당시에는 카드가 아닌 식권이라는 종이로 하루 3,000원씩 발급이 되었습니다. 이 종이가 있을 때는 김밥으로 끼니를 챙길 수 있기는 했지만, 어느 날 식권을 잃어버림으로 굶어야만 했습니다.


결식아동 대상자로서 이렇게 굶고 있는 저의 상황을 집 앞 교회의 한 사모님께서 아셨습니다. 어느 날 이 사모님이 저와 형들을 차에 태우시고 샤브샤브 집으로 이동하셨습니다.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샤브샤브였습니다. 그곳에서 저는 샤브샤브를 매우 맛있게 먹고 후식으로 코코아까지 마신 게 17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. 당시 형이 중간에 감기 기운이 있어 병원까지 데려다준 것 역시 생생합니다. 이러한 기억 자체가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.


원래 저는 유치원을 다닐 때까지 강제로 다른 반으로 옮겨질 만큼 쾌활했습니다. 하지만 초등학생이 되면서 저의 성격은 180도 바뀌었습니다. 전 삶의 의미를 몰랐습니다. 입을 닫고 조용히 지냈습니다. 유급의 위기를 수없이 겪을 만큼 학교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. 학교를 가는 대신 PC방에 갔습니다. PC방에는 저와 같이 방황하는 친구와 형들이 있었습니다.


한 날 저보다 3살 많은 형한테 협박을 받았습니다. 그는 제게 너네 집 찾아가서 다 부순다.” 등의 협박을 했습니다. 맞아 죽을 것 같아 지하철을 타서 먼 곳으로 도망쳤습니다. 지하철 역사 안에서 반나절을 있다가 밤이 되면 뒤를 돌아보며 집에 들어가곤 했습니다. 또 다른 형은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머리에 피가 흐를 만큼 죽을 듯이 때렸습니다.


초등학교 4학년 무렵 급격히 자살충동이 몰려왔습니다. 이때부터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. 2년이 넘도록 심리상담을 받았지만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. 중학교 1학년 때 정신과 약물 치료도 받았습니다. 혈압이 180, 숨이 도저히 안 쉬어지고, 온몸에 작열감을 느끼는 불안과 신체화 증상을 매일 겪었습니다. 세상에서 저는 버려진 것만 같았습니다. 아무도 저를 돌봐주지 않았습니다.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가셨고, 어머니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일을 하시느라 바쁘셨습니다.


이 시기 한 사회복지 센터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. 은퇴한 70대 노부부가 저희 가정과 결연을 맺으며 매주 함께 투어와 식사 등을 했습니다. 저의 상황을 잘 아시는 할아버지와 사모님이 제 얘기도 들어주셨습니다. 당시 저는 심각한 공황장애로 집 앞 마트조차도 가기 힘들어했습니다.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저를 도와주시기 위하여 매주 여행 일정을 잡으셨습니다. 어느 날은 매우 상태가 안 좋아 약속을 잡아놓고 못 가게 되었는데, 이때도 사랑으로 이해해주셨습니다. 가난으로 그동안 먹어보지도 못했던 스테이크 등 맛있는 음식을 사주시고, 가족처럼 챙겨주셨습니다. 한부모가정과 다문화가정으로서 자라오며 미처 받지 못한 애정의 결핍을 채워주시는 듯했습니다.


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께서는 저의 가정과 건강 상황을 잘 이해해 주시고 돌봐주셨습니다. 그동안 장학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는데 이분으로부터 장학금 제도에 대해 처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. 공부를 잘하지 못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상황이 어렵다면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. 이분으로부터 시작된 장학금에 대한 도전이 현재까지 이어져 파안장학문화재단도 알게 된 것입니다.


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어느 익명의 분께서 복지관에 전화하여 제 이름을 부르시고는 정기적인 후원을 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. 저는 1년에 한 번씩 이분으로부터 생활비, 학습비 지원 등을 받게 되었습니다. 얼굴도 못 뵀고, 성함도 모르지만 익명으로 제게 주는 짧은 편지는 저를 감동케 했습니다. 학업적으로, 심리적으로 지칠 때 이 짧은 편지 문구를 보면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. ‘이 세상에는 얼굴도, 이름도 서로 모르더라도 사랑해 줄 수 있구나.’라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.


저는 친구에게도 많은 빚을 진 자입니다.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현재까지 알고 지내는 친구는 저의 상황을 알고 자주 도와주었습니다. 배고파서 견디지 못할 때 자기의 용돈으로 늘 먹을 것을 사주었습니다. 왕따 생활로 힘들 때 같이 밥을 먹어주었습니다. 자전거를 좋아하지만 가난해서 장만하지 못하는 제게 자전거도 선물해주고, 교통비가 없어 힘들어할 때 교통비도 내주는 따뜻한 친구입니다.


고등학교에서 알게 된 또 다른 친구의 할머니는 저의 상황을 아시고 학교 행정실에 제 이름을 부르시며 후원을 해주셨습니다. 이때도 익명으로 후원을 해주셔서 복지관을 통해 후원한 분과 같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.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직전, 친구로부터 우리 할머니가 너를 도와주고자 하셨어.”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, 몸을 두지 못할 정도의 감사함을 느꼈습니다. 비록 살아가면서 안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, 이러한 사랑도 함께 있었기에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.


초등학교, 중학교, 고등학교 생활 모두 제게 고난이었습니다. 그러나 고난 속에서 은밀하게 챙겨주시는 분이 계셨기에 현재는 그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자 합니다. 고등학생 때부터 익명으로 후원을 해주신 분께서는 제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챙겨주셨습니다. 대학생일 때는 여러 장학재단에 지원을 했습니다. 비록 떨어진 적이 훨씬 많았지만, 이 가운데 합격을 통해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어 힘이 되었습니다.


초등학생 때부터 사회복지사로부터 정기적으로 물품 지원 등을 받고 함께 프로그램도 해보았습니다. 고등학생 때 알게 된 여러 사회복지사분들과 현재까지도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저는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은 자입니다. 이제는 대학원생으로서 예전과는 달리 오직 스스로 해야 할 때입니다. 그렇지만 솔직히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하기가 어려웠습니다. 특히 경제적인 문제가 그랬습니다. 대학원생이 된 이후 보살핌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었습니다.


하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제가 파안장학문화재단을 알게 되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. 대학원생이 되어 받은 첫 장학금이라 제게는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. 저는 제게 도움을 준 모든 사람과 단체들을 다 기억합니다. 중학생 때부터 받은 장학재단의 명칭을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. 파안장학문화재단 역시 평생 잊지 못할 존재입니다. 현재는 빚진 자로서 살아가고 있지만, 파안의 뜻대로 이를 다시 베풀고, 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겠습니다. 그러기 위해 저의 꿈을 향해 전진하겠습니다. 감사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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